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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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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미술사전’ 김달진을 아시나요

관리자

평생 현대미술사 자료들을 수집, 정리해 온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장.
  [행복편지 편집자 주]
  미술자료 수집 40년! 팸플릿, 도록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녀 오른쪽 어깨가 처져 있는 남자. 그는 미술자료 전문가로 오늘의 미술계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해서 남겨야겠다는 사명감 하나를 가지고 오늘도 화랑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미술 역사가 궁금하세요? 그러면 저에게 연락 주세요. 저는 걸어다니는 미술사전입니다.”
 
  어느 날 한 언론사의 미술 담당 기자가 그에게 “너무 편집광적인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술자료의 잘못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발견하는 순간 바로잡아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술계가 외형적으로는 비대해졌으나 제대로 된 미술인명감, 미술가사전 등이 없는 실정이라며 현대미술의 역사를 정리하는 기초자료들을 그러모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미술공부를 하는 학생이나 미술 애호가가 엄청나게 늘어가는 시점에서 미술자료를 찾는 사람들에게 안내자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도 열심히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자료에 대한 몰이해와 부정확함 때문에 제대로 미술사 서술이 어렵다는 건 미술계 발전의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며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는 말을 늘 상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난제를 푸는 데 조그만 힘을 보태기 위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고 그 일을 통해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 일들이 취미로 하든지 또는 직업으로 하든지 그런 사람은 그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을 느낍니다.
 
  그는 이야기합니다.
 
  “각 분야에서 나름 성공한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성공의 잣대로 삼고 있는 기준이 바뀌어가고 있으며 또한 기준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권력과 영향력, 돈과 인기를 성공의 중요한 잣대로 생각하고 있지만 저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돈의 유무나 사회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삶을 살고 싶었고, 내가 즐겁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김달진씨가 쓰는 이야기와 김달진연구소 현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릴 때부터 수집하는 취미 붙여
 
  저는 5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위가 누님이며 큰형님은 아버지처럼 느껴질 만큼 나이 차이가 많았지요. 어머니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성격이 내성적이 되었고 특별히 큰 재주도 없고 잘 놀지도 못해서 혼자 할 수 있는 놀이가 저에게 맞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서부터 수집이랄 것도 없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그냥 우리가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담뱃갑, 껌 종이, 동전 등 아주 단순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인데도 그런 것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그것들이 하나씩 쌓여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저는 고향이 충북 옥천군 이원면이었는데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셋째 형님이 계신 대전으로 나와 충남중학교를 다니면서 우표를 모으는 일을 나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기념우표가 나오는 날에는 언제나 우체국 창구에 남보다 먼저 달려갔고 일부는 우표상을 통해 사기도 하고 또 교환도 해서 꽤 많이 모았습니다. 당시 인기를 끌던 동화시리즈, 조선시대 명화시리즈 등은 지금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모으던 수집품 중에는 미술에 관련된 것으로 명화 도판도 있었습니다. 우표뿐만 아니라 《주부생활》, 《여원》, 《여성동아》 등 여성잡지에 컬러 인쇄로 실린 세계의 명화가 눈에 띄어 습관처럼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그림을 모으는 일은 다른 수집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제가 세계명화를 모은 이유는 보기가 좋아서였습니다. 그러다 그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읽는 것에 재미를 느꼈는데 그러다 보니 차츰 미술 관련 도서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어,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고 싶어 《서양 미술사》(이영환 저)를 열심히 읽었는데,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름 서양미술의 흐름을 유파별 중심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서울로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그때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한 것이 지금의 제 인생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하는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러 가는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상범… 자료로만 접했던 근대작가의 작품들을 직접 본다는 것…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명작가에 관해서는 화집이나 팸플릿을 통해 자료조사가 쉬웠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작가의 경우 상대적으로 화집이나 팸플릿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단순히 취미에 불과했던 저의 수집벽은 드디어 목적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술계에는 한국 근대미술작가에 대한 기록이 빈약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료가 필요하더라도 구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서 저는 그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또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인생을 투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본격적으로 미술자료 수집 공부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미술계에 자료 분야는 황무지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너무나 갑갑한 나머지 미술잡지사, 화랑, 미술관, 미술평론가 등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 요지는 지금까지 모아왔던 미술자료, 미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평생을 미술계에 뼈를 묻고 싶으니 자료가 있으면 저에게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의 치기로 치부하였는지 대부분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취미가 직업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뿌리 깊은 나무》 편집장의 유일한 격려문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KimDaljin Museum of Art Materials)

 
  김달진 관장이 40여 년간 수집해 온 자료 중 사료적 가치가 큰 기록물과 자료를 수집, 분류, 보존, 연구하기 위해 2008년 3월 개관한 국내 최초의 미술자료 전문 박물관.
 
  박물관은 전문 아카이브의 역할을 실천하기 위해 예술창작과 학술연구의 기초 작업으로서 미술 관련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효율적으로 관리 및 보존하고 있으며, 연구된 자료를 중심으로 전시회를 열고 자료집을 발간하고 있다. 특히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희귀자료부터 재평가받아야 할 기록물에 이르기까지 미술자료에 대한 올바른 의미와 가치를 전문 연구자와 일반 시민에게 소개하고 있다.
 
  주요 전시로는 ‘미술 정기간행물 1921~2008’전(展)을 시작으로 ‘미술인의 운문과 산문’전, ‘한국 미술사 + 화가의 초상’전, ‘해방 전후(戰後) 비평과 책’전, ‘한국현대미술의 해외진출 - 전개와 위상’전, ‘외국미술 국내전시 60년’전 등을 선보인 바 있다.
 
  박물관의 주요 소장 자료로는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그 후 출간되었던 우리 미술 관련 단행본, 정기간행물 자료들부터 현재에 이르는 학회지, 논문, 도록 및 팸플릿, 신문기사 스크랩, 그리고 270여 명의 자료가 축적된 작가 개인파일까지 방대하며 이러한 한국 근현대 미술사 관련 소장품은 우리 미술의 형성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달진미술연구소는 40여 년간 수집한 미술자료와 그동안 박물관에 기증해 준 소중한 자료, 근현대 미술 분야 단행본과 정기간행물 및 화집·학회지·학위 논문·전시팸플릿·작가개인파일·신문기사·기타 영상자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미술자료를 소장·전시·개방하고 있다.
 
  홍익대 박물관의 문을 두드리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병역의무를 마친 1978년 어느 날, 동대문도서관에서 월간 《전시계》라는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순간 나는 이곳에서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즉시 함께 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전시계》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첫 직장을 얻게 되었는데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감격으로 밀려왔습니다.
 
  당시 《전시계》는 처음에는 산업전시를 함께 다루다가 미술전시로 한정하여 전시작품, 기간, 장소를 화보 중심으로 실어 발행하다가 전시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미술 애호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시계》는 한국근대 작고미술가 인명록, 근대미술단체 및 주요 전시회를 기획물로 연재도 하는 등 나름 미술계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저에게 좋은 경험을 하게 만들었으나 1980년 정부의 언론 통폐합정책에 따라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 후 8월에 이경성 홍익대 박물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됩니다. 이 관장님과 저와의 관계는 제가 고3 시절 생면부지의 당시 이경성 관장님을 찾아가 넙죽 절하고 그간 모아 정리했던 미술 관련 자료 스크랩북을 줄줄이 펼쳐 보여드렸는데 관장님은 어린 학생이 기특하다면서 제 등을 두드려주고 기회가 있으면 다음에 보자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를 상기하여 관장님을 찾아가 저는 청소부든 뭐든 좋으니 제가 미술관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말씀드렸고, 이를 계기로 저는 일당 4500원의 임시직이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본격적인 미술자료 정리 인생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현대미술관에는 학예직이 없었고 전문위원으로 한 사람 미술평론가 오광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미술관 동관 1전시실을 비워 전문위원실과 자료실로 만들어 자료를 정리했었는데, 전국 각지의 화랑에서 열리는 전시 팸플릿이 미술관으로 배달되어도 수집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화랑들이 자료를 보내주면 수집 정리가 되지만 보내지 않으면 자료가 누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금요일 출장을 나가 전시장을 순회하며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회 코스는 신문회관을 시작으로 사간동, 인사동 일대, 서울대병원을 가로질러 동숭동으로 가는 구간의 모든 전시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직접 작가들의 작품을 눈으로 볼 수 있어 자료를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1980년대 중반 강남 신사동, 청담동 등지에 화랑이 늘어나고 전시회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면서 전시회를 모두 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였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팸플릿 작품과 실제 전시작품이 다른 것, 어떤 작품은 같은 기간에 열리는 두 전시회에 자료가 실리는 경우도 종종 발견하게 되어, 이런 문제점에 대해서 당시 유홍준 선생님이 주간으로 있던 계간 미술잡지 《선미술》에 칼럼을 통해 ‘관람객은 속고 있다’ - 부제 ‘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세월 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바탕으로 첫 번째 고발의 글을 통해 작가의 약력, 작가의 연보, 미술연표, 미술연감 등에 나타난 오류, 오기, 누락의 사례를 들며 심각성을 환기시켰는데 많은 언론이 인용 보도했습니다.
 
한국미술정보센터
  (Korea Art Archives)

 
  2007년 이후 다양한 미술자료와 간행물을 일반인에게 제공해 왔던 미술자료실이 2010년 한국미술정보센터의 개관을 계기로 대중의 편익과 공공성을 지향하는 열린 공간으로 한 단계 더 확대되었다. 근현대 미술단행본, 정기 간행물, 작가화집, 학회지, 학위논문, 전시팸플릿, 작가개인파일 등 광범위한 영역의 아카이브 자료 및 열람실을 공개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일반 공개 가능한 소장자료를 연구자 및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도록 주 6일 연속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또한 별도의 열람서비스를 돕기 위해 인터넷 사이트(www.artarchives.kr)도 운영하고 있다.
 
  열람시간은 하절기 평일 10시부터 18시까지(토요일은 10시부터 14시까지)이며 동절기에는 평일 10시부터 17시까지(토요일에는 14시까지) 운영하고 있다. 02-730-6216. 서울시 마포구 창천동 6-4.
 
  국립현대미술관 시절
 
  그 후 저는 본격적으로 미술 관련 글을 쓰기 시작하여 ‘60여 개의 미술공모전, 그 실상과 허상’, ‘공예대전-통계로 본 역사와 현황’, ‘1980년대 한국미술연표’, ‘미술상의 실상을 분석한다’, ‘미술연감은 발행되어야 한다’, ‘동구미술 어디까지 왔나’, ‘미술잡지의 홍수, 실상을 분석한다’ 등 미술계 현황을 자료조사 통계를 근거로 보도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를 가장 슬프게 한 것은 제 학력이 고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나름 미술자료에 관한 일은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 여겨왔는데 학력을 우선시하는 사회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분명하였습니다. 저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여 1985년에 성균관대 한국사서교육원을 수료하고 준사서자격증을 받았고 2년 뒤에는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를 지원했는데 이는 영어, 석고데생, 정밀묘사 시험만으로 입학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번이나 낙방하고 서른네 살 나이에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 교육은 저에게 또 다른 사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스케치와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설령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품이라도 작가는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국내 미술자료 실태와 관리개선 방안연구’라는 논문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5년 3월에는 그동안 정리한 미술 원고들을 정리하여 《바로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이경성 관장과 미술평론가 유홍준 선생님 두 분이 추천사를 써주셨는데 이경성 관장님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김달진 하면 나보다도 우리 미술계를 더욱 잘 아는 존재이다. 그와 같은 사람은 미술관이 제대로 돌아가고 또 미술계가 올바르게 발전하려면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인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김 군처럼 자기가 좋아서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시내에서 회의를 하다가 어느 작가에 관한 자료, 예를 들면 그 작가의 생년에 관한 문의가 생기면 꼭 전화를 들어 김 군을 찾는다. 대부분의 경우 카드를 보지 않고도 대답할 만큼 그의 머릿속은 자료로 가득 차 있다.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존재이다.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나의 홍대 연구실을 찾은 지 23년, 나는 늙어서 머리에 흰 구름이 가득 찼지만 주변에 김 군과 같은 존재가 있어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기틀이 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유홍준 선생님은 ‘나의 또 다른 동반자’라는 추천사를 통해 “한국 현대 미술사의 살아 있는 컴퓨터이고 미술계의 인간 자료실”이라면서 “현대미술에 관한 한 어줍지 않은 나의 비평문은 잠시간의 반짝임만으로 그 생명이 끝나고 말 건만, 김달진의 명확한 자료와 함께 제시한 증언들은 그 자체가 사료로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 같다. 이 점을 생각하니 나의 삶이 대단히 소비적인 것이며, 고달파 보이던 김달진의 작업과 글쓰기가 진짜 복되고 보람찬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라고 찬사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4년5개월간 생활하였으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마음속의 고향이며, 내 손때가 묻은 자료들이 지금도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 후 가나미술연구소 자료실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면서 미술잡지 《가나아트》를 발간하고 미술컨설팅도 하면서 자료실 운영, 미술저작권 사업, 《가나아트》 편집에 참여하고 《화랑·미술관 전시회 가이드》를 만들었는데 이 가이드는 격월간지로 서울의 160여 개 화랑 및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일정, 전시장의 위치와 주소, 전화번호를 수록하여 미술 애호가들이 좋은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가나미술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과정에서 유럽 5개국 12개 도시의 36개 박물관과 미술관 - 프랑스의 퐁피두센터,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피카소미술관, 로댕미술관, 샤갈미술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데이트갤러리, 내셔널갤러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반 고흐미술관, 독일의 페르가몬박물관, 게멜데갤러리, 신국립미술관, 피나코테크미술관, 이탈리아의 바티칸박물관, 우피치미술관, 보르게제미술관 등 - 을 섭렵할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체험하고 느낀 일들이 오늘의 미술연구소를 만드는 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아트센터에서의 생활 5년10개월을 마감하고 독립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1997년 제2회 월간미술대상에서 미술자료 수집 정리에 기여한 바가 크다 하여 특별부문 장려상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의해 ‘한국신지식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김달진미술연구소가 국내 미술정보의 체계적인 자료수집과 연구를 위해 2001년 12월 개소한 이후 2002년 1월 창간한 정보지. 국내외에서 개최되는 최신 미술 전시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정보지이며, 2012년 6월 통권 126호를 발간하였다. 또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빠르게 미술정보를 확산 소통시키고 있다. 이 잡지는 국내외 미술현장 소식, 칼럼 등 정확하고 전문적인 미술정보를 수록하여 발행하는 무가잡지로 전시장의 연락처 및 전시 일정, 전시 홍보 등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2002년 9월 선보인 미술종합포털 달진닷컴(www.daljin.com)은 서울아트가이드의 확장 영역으로 현재 최고의 미술정보 웹 사이트로서 동시대 미술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있으며, 검색 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미술정보를 신속하고 편리하게 제공하는 등 콘텐츠 자체로 하나의 온라인 아카이브라고 할 만하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미술계 뉴스와 동정, 전시회 소식, 미술공간 정보, 공모전 소식, 신간서적, 유명 필자들의 칼럼, 5000여 명의 미술가 인명사전, 주요 미술잡지 목차서비스 등 광범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미술 단행본은 물론 서점에서 판매되지 않는 전시도록, 팸플릿, 학술지 등도 공급하고 있다.
 
  그동안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에서 발간한 도서는 2008년에 발간한 《미술정기간행물 1921~2008》, 2009년 《한국미술사+화가의초상》, 2010년 《대한민국미술인 인명록I》, 2011년 《한국현대미술 해외진출 60년》 등이 있으며 외부기관 지원으로 미술연감 조사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연감》, 《한국미술》 등에 당해연도 미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미술 시장과 미술 애호가들의 증가에 따라 작가, 전시회, 전시공간, 관람객, 미술시장에 대한 정보의 양은 무한대로 증가하고 있으며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여 온라인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어떠한 검증작업 없이 대량으로 자료가 쏟아져나오는 시점에서 가치 있는 자료에 대한 선별, 그리고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는 자료를 분류, 정리, 기록, 보존하고 아카이빙하는 작업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정보의 부가가치는 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리와 재생산에 있다. 김달진미술연구소와 박물관, 정보센터는 아카이브와 정보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앞으로 공간 확보, 자료의 DB화를 위한 재원 확보, 소장품의 보존과학처리 등 많은 과제를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후원회
  국민은행 343601-04-060645
 
  드디어 문 연 김달진연구소
 
이호재 가나화랑 대표.

  드디어 저는 2001년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소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시작한 모으기라는 취미 활동이 결국은 내 이름을 건 연구소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나만의 일터는 가슴 벅찬 환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을 바탕으로 멋진 연구소를 운영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첫 번째 작품으로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하였는데, 이는 가나화랑에서 발행하던 《서울전시회가이드》를 보완, 그동안 전시회 정보만을 소개하던 가이드북에서 탈피하여 ‘이경성칼럼’, ‘나의 발언’, ‘다시 읽기’, ‘미술평론가가 평가한 전시회’, ‘미술 신간’ 등을 읽을거리로 제공한 잡지 형식의 책입니다. 국내외 미술현장 소식, 칼럼 등 정확하고 전문적인 미술정보를 수록하고 전국의 전시장 연락처 및 전시 일정, 전시 홍보 등을 소개해 지금도 미술 애호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서울아트가이드》 외에 작가별 자료 정리, 작고 미술가 인명록, 미술계 주소록 등도 차근차근 작업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에 두 사람의 큰 은인을 만났습니다. 먼저 석남 이경성 관장님을 인연으로 해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으며 석남미술문화재단에서 대학·대학원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또 가나화랑 이호재 대표의 도움으로 독립의 꿈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취미였던 미술자료 수집이 천직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의 일은 신문 전면 인터뷰,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의 단독프로 방영까지 과분한 주목을 받아왔으며 이에 보답하는 길은 미술자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 모두에게 아낌없이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급변하는 사회,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의 정보사회는 새로운 사회가 색다른 문화를 잉태하는 정보가 물질이나 에너지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사회입니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정보는 시간적 추이와 새로움을 찾는 수요에 부응하여 새로운 미술사조와 세계 미술계의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미술의 주체적인 확립, 넓게는 우리 미술이 세계미술 속으로 진입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미술계도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미술관, 화랑, 미술대학, 연구소, 작가, 경매, 전시회, 미술 관련 이벤트 등 수많은 정보를 얻어 유용하게 사용하는 추세로 첨단매체와 통신을 이용하여 미술정보를 영상으로 얻을 수 있고 안방에서 작품 감상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미술관, 화랑 및 작가들이 미술 사이트를 만들고 업체까지 가세해 열풍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미술공간도 확대돼 건축물 안의 전시장 또는 야외 공간에서의 전통적인 전시회 외에 가상공간에서의 전시회도 증가하고 있어 작가들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김달진미술연구소로 많은 분이 자료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정모씨로부터 받은 이메일은 “미술서적을 출판하는 데 도판자료가 필요하다. 보내줄 수 있느냐”면서 22점 작품 목록까지 첨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 박모씨로부터는 “한국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 소속으로 많은 화가가 종군 화가단에 참가해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얼마나 많은 화가가 어디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리고 참여한 작가들은 누구누구인지 자료를 구하고 싶다”, 또 다른 분으로부터는 “중국에서 월북 작가인 김주경, 정종녀 등의 작품을 구해왔는데 가격이 얼마나 하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작가의 주소를 묻거나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작가를 찾아달라는 문의 등 다양한 요청이 전화나 이메일 등을 통해 오고 있으며, 또한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기 위해 연구소를 직접 방문하여 자료를 구하는 등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들이 사회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기여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 벅찬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느 분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달진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이다. 자료수집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면 한쪽으로 축 처진 어깨가 떠오른다. 무거운 자료가방 때문이다. 어깨와 목에 탈이 생겨 수술을 하면서도 미술에 대한 그의 집념은 국내외 미술의 흔적을 묵묵히 대변한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가시밭길 같은 미술자료를 집대성하는 일은 결코 개인 일이 아니었다.
 
  국립미술관이나 정부에서조차 외면하고 있을 때, 김달진이라는 ‘바보’는 말없이 후미진 골목을 누비며 자료를 모았다. 그 같은 자료의 집성은 결국 ‘걸어다니는 미술인명사전’으로 ‘등극’하게 했고, 이젠 우리 미술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게 하였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미술자료에 대한 지원이 미약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형성하고 발전시킨 방대한 미술계 정보를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보가 산을 옮긴다고 했는데 우리 미술계에 진짜로 필요한 것은 이 같은 ‘바보들’의 진정성이다.”⊙
 
  ※ 이 내용은 김달진님의 자료를 바탕으로 행복편지에서 정리했습니다.
      중간제목은 《월간조선》이 붙였습니다.
 

 

-월간조선 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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